100년 앞서 총을 도입하고도 일본에게 정복당한 류큐 왕국의 몰락

일본에 총이 전래된 것보다 약 백년 일찍, 류큐에는 총의 근원이 된 화기가 중국에서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류큐에서는 '히야'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총이라고 하면, 전국시대에 다네가시마에 전래되었죠. 화승총이 유명합니다만, 사실, 그 이전부터 초기의 총은, 류큐에서도 존재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당시의 중국은, 이미 칼과 창의 싸움에서 포를 사용한 화력의 전쟁으로 이행하고 있어, 이전에는 열세였던 기마민족에 대해, 방어전에서 우위에 서 있었습니다.
원거리 화약무기는 적을 가까이 하지 않아도 되기에 전투로 인한 피해와 손해를 작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방의 기마 민족들이나 해적들의 침입에 좀더 쉽게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명과 밀접한 외교를 해온 류큐도, 해적인 왜구에 대한 대책과 방어병기로서 명으로부터 일찍이 총을 수입해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번영과 평화 속에서 류큐는 너무도 안일해습니다.
1609년, 일본 규슈의 사쓰마번은 약 3천 명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류큐 왕국을 침공했습니다. 당시 류큐는 단순한 작은 섬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를 잇는 해상 교역국으로 번영했고, 명뿐 아니라 서양의 신식 무기까지 거래할 만큼 국제 네트워크도 발달해 있었습니다. 병력 역시 약 7천 명 수준으로, 사쓰마군보다 4천 명가량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류큐는 불과 두 달여 만에 무너졌고, 왕 쇼네이는 사쓰마에 끌려가 항복했습니다.
그 원인은 단순히 무기 수준의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사쓰마군은 오랜 일본 내전과 임진왜란을 거치며 실전을 통해 단련된 정예병이었습니다. 반면 류큐는 수백 년간 평화를 유지하며 실전 경험이 거의 전무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은 정치적·문화적 구조였습니다. 류큐 조정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경시했습니다. 따라서 군 지휘부는 대부분 문관 출신으로, 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전투가 벌어지자 군사들은 우왕좌왕했고, 효과적인 지휘 체계가 작동하지 못한 채 수적 우위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실전 경험과 지휘 체계의 차이가 수만의 병력보다 더 큰 격차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사례는 오늘날 한반도 정세에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한 북한군 일부는 실제 전투 경험을 쌓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실전 경험은 단순한 장비보다 훨씬 무서운 전투력을 만듭니다.
한국은 경제력과 첨단 무기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북한을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류큐 왕국처럼 “실전 경험의 격차”가 전쟁의 향방을 뒤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련유튜브
https://youtube.com/shorts/v5FUMVR4c_o?si=6-ZW2AaRYes2XvFF
한국이 심각하게 착각중인 강력한 자주국방의 조건 #자주국방 #역사
류큐는 일찍이 명과의 조공관계로 일본보다 100년 일찍 삼혈총이라는 화약무기를 수입 제조했으며 일본도를 동남아로 중계무역 할정도로 당시 신식 무기로 무장할수있는 여건은 충분했죠.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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