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절이 다가오는 가운데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고 있는데요. 오늘은 우리의 잊힌 한민족이자 독립군의 후손인 고려인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고려인의 아픈 역사와 치열한 삶의 역사
중앙아시아에는 고려인이 37만여 명이 있는데 이 지역 중 우즈베키스탄에 23만명이 거주하고, 카자흐스탄에 10만 명을 비롯하여 기타 지역에 4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앙아시아를 포함하여 구소련지역 전체에 고려인 거주자 수는 약 45~5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고려인들을 부를때 한국에서는 '까레이스키·코레이스키(Корейский)'라는 러시아어 명칭이 부르기도 하는데 이건 매우 잘못 알려져 있는 명칭입니다. 러시아어에서 '코레이스키'는 '한국의, 한국인의'라는 형용사일 뿐, 고려인을 지칭하는 명칭은 아닙니다.
러시아에서는 한국인을 '코레이치(Корейцы)' 혹은 '코레예츠(Кореец, 남성)', '코레얀카(Кореянка, 여성)'로 부릅니다.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국계 그룹을 지칭할 때는 '코료사람(Корё-сарам)'이라는 표현이 흔히 사용됩니다. 여기서 '사람(сарам)'은 한국어 단어 '사람'의 음역 그대로를 발음한 말입니다. 그러니 옳은 표현은 '쿄료사람' 혹은 '고려사람' 또는 고려인으로 부르는 게 맞습니다.
이 고려인(高麗人)은 구 소련 지역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통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지만, 구소련 붕괴 전에는 '한국계 소련인'으로 불렸습니다.
이들 약 50만 명에 달하는 대부분의 고려인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살고 있으며, 남부 러시아의 볼고그라드,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캅카스 지역에도 소수의 고려인 공동체가 존재합니다. 이들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대부분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령 시절 조선에서 기아와 굶주림 그리고 지주와 탐관오리의 수탈과 핍박을 피해 프리모리예주(연해주)로 이주한 초창기 조선인들에서 기원합니다.
특히 이 당시 연해주에 거주하던 고려인 상당수는 일제에 항거한 무장 독립투쟁을 하던 독립군과 그 가족인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수십 년간 버려둔 잊혀진 독립군 후손들인 거죠. 그렇기에 최근 이들 독립군 후손들에 대한 예우를 위해 한국 정부와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와의 교류를 대폭 늘리고 있는 이유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장 독립군의 주축이 되었던 고려인 사회는 러시아 제정시대가 끝나고 사회주의 정부가 세워진 후 1937년, 스탈린 정권이 볼때 일본에게 강력한 무장투쟁을 지속하며 강한 결속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고려인 사회가 독립을 요구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고려인들의 강제 이주령을 승인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연해주 지역에 삶의 터전을 일궈서 거주하던 고려인들을 하루아침에 모든 터전을 놔두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하고 맙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고려인들이 혹독한 추위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사하거나 동사했고 강제 이주를 거부하는 자들은 살해 당했습니다. 이주 후에도 소련 정부의 심한 차별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고려인들은 한인 특유의 근면과 성실함을 무기로 서로 협력하여 척박한 땅에 관개 시설을 설치하고 벼농사를 시작하며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중앙아시아 사회가 고려인들이 깊게 뿌리를 내리며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내륙의 중앙 아시아 지역의 고려인들이 러시아 제국 시절 먹고 살길을 찾아 어쩔 수 없이 이주한 조선인들인 반면 한반도와 가장 가깝게 접한 사할린섬에 존재하고 있는 한인 공동체인 '사할린 고려인들'은 일본 제국의 강제동원 정책에 따라 일제 강점기 시절 징용된 한인들이 종전 이후 사할린이 소련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그대로 방치되면서 형성된 한인 사회입니다. 사할린 한인은 일제 전시 체제 시기의 강제동원 피해자로, 중앙아시아 고려인과는 그 정체성이 다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또 다른 고려인으로 불리는 프리모리예 지방(연해주)의 고려인의 경우는 구소련 시절 북한에서 이주노동자로 건너왔다가 그대로 연해주에 남은 북한 출신 사람들로 구성된 한인 사회입니다.
이렇듯 고려인은 크게 러시아 제정시대에 연해주로 이주했다가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다시 이주당한 중앙아시아 고려인과 일제시대 강제 징용 되었다고 종전 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할린 고려인 그리고 북한 노동자들이 구소련 시절 연해주에 노동자로 왔다가 그대로 정착한 북한 출신 고려인 사회로 나눠집니다. 이들의 한인 사회 구성 시기와 역사적 발생 원인이 다르기에 그 한인 사회의 성향과 문화도 상당히 다릅니다.
'고려'라는 명칭은 조선의 일본 병합 후 러시아 내 조선인 커뮤니티가 본국 조선과 완전히 단절되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조선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상황에서 러시아어의 'Корея'와 유사한 발음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미 해방 전 소련 시기부터 고려인들은 '고려'라는 명칭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아마 조선의 수탈을 피해 고향과 조상의 묘를 등지고 도망치듯 이주할 수밖에 없던 유민들이 조선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고려인의 후예라고 지칭한 영향도 크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오늘날 고려인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각지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독립적인 문화를 꽃피우며 다양한 사회활동하고 있으며, 한국과의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들의 정체성은 거주 지역과 역사적 배경에 따라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한민족의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 그리고 연해주의 북한 출신 이주민들은 각각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고려인이라는 명칭 안에 담긴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우리가 한민족이라는 공통의 뿌리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고려인의 역사는 수세기 외세의 억압과 굴곡 많은 우리 아픈 역사 속에서 한민족의 강인한 생명력과 적응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살아 숨쉬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 기세월 수세대를 거치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우리의 뿌리인 문화를 지키며 새로운 터전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한 고려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고려인들은 그들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더욱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뿌리가 여전히 한반도에 있음을 자랑으로 여길수 있도록 우리는 그들과의 교류를 계속 이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또 다른 아픈 뿌리가 중앙아시아 멀리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8.15를 맞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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